2007/09/25 00:18

넥스트 (Next / 2006)



마이클 크라이튼 / 이원경 역 (김영사 / 2007)

[에어프레임]을 기점으로 하염없이 재미 없어지기 시작한 크라이튼의 신작. '[쥬라기 공원] 이후 마이클 크라이튼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소설!'이란 문구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확인도 안하고 그냥 사서 읽어 버렸다.


[넥스트]에서 크라이튼은 이전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나, 지난해 아카데미를 받은 [크래쉬], 혹은 [바벨]같은 영화에 영향을 받은듯, [넥스트]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주변 이야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은 모두 유전자에 연관된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다. 국지적 규모의 유전자 회사의 CEO, 유전자 소유권 분쟁에 휘말린 아버지를 구하려는 변호사, 정체불명의 유전자를 흡인한 뒤 인성이 변한 사내, 뇌활성 촉진 유전자 이식으로 머리가 좋아진 앵무새, 심지어는 사람의 말을 하는 침팬지까지 이 사건의 주역들이다. 이 캐릭터들은 미국 전역에 살고 있는 이들이지만, 내용이 진행될수록 이들의 관계는 서서히 얽히고 섥힌다.


크라이튼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넥스트] 역시 철저히 미국적인 정서를 깔고있다. 등장인물들이 많은 탓에 그 캐릭터들이 속한 가족들도 많이 등장하지만, 어느하나 정상적인 이들이 없다.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가족관계는 피폐한 상태고 그들은 대부분 재정적인 문제나 수직관계의 틈새에서 야심을 펼치지 못하는데 대한 좌절감, 혹은 변태 성욕이나 불륜에 탐닉하고 있다. 그리고 크라이튼에게 있어서 이 스케치는 '미국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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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 커버

물론-역시 크라이튼의 여느 소설처럼- 모든 캐릭터들은 무시무시하리만치 똑똑하다. 누군가의 입을 빌려 한 가지의 개념을 설명해야할 찰나가 되면 크라이튼은 지면을 아끼지 않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등장인물들은 마치 학술 발표회처럼 자신의 머릿속에 든 지식들을 좌라락 내뿜는다. 이전 작품들에서 캐릭터들의 입이 좀 조용할때 작가의 시점으로 설명되곤 하던 장광설들은, 이번에는 가상의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발췌한 형태로 보여지고... 그리고 그 대부분은 사실 소설의 내용과는 별로 상관없는 여벌의 것들이다. [쥬라기 공원]에서 DNA연구에 대한 장광설, [떠오르는 태양]에서 미일간의 경제 협약에 대한 장광설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딱 바로 그 수준. 이전작들의 지적뽐내기에 매료되었던 사람이라면 좋아할 것이고,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여전히 재수 없을 텍스트들이다.


역시 관건은 소설적 재미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넥스트]는 좀 탄탄하지가 않다.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이야기거리로 끌어당겨 진행하는지라 단편적인 재미는 있지만, 그 단선적인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는 응집력은 소설 후반부로 가도 여전히 부족하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친척관계나 동료, 친구관계로 묶이게 되지만 그 결과가 어떤 반전 상황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과 아들의 유전자를 채취하려는 현상금 사냥꾼들을 피해 달아나는 알렉스 버넷의 경우, 친구인 린 켄덜의 집을 찾아간다. 린 켄덜은 유전자 공학자인 남편이 데려온 유인원과 인간의 교배종인 데이브를 키우고 있다. 두 개의 사건은 하나로 만나지만, 그냥 각각의 여정에 인원수가 더 늘었을 뿐 어떤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알렉스나 린은 친구이기라도 하지. 이들의 추격전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앵무새 제라르의 경우는 그냥 하염없이 날라다니다가 '우연히' 알렉스 버넷의 눈에 띄게된다-이런 식의 엄청난 우연도 많이 가미된다.


결정적인 약점은 캐릭터의 얼굴등에 대해 시각적인 인지가 가능한 영화와는 달리, [넥스트]가 소설이라는 점. 그래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에피소드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읽던 부분을 다시 찾아 읽을 때마다 앞 페이지를 훌훌 넘겨가면서 이름과 대충 상황을 재점검하느라 꽤나 고역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전형적인 SF의 플롯이 되어야할 소설에 법정 요소들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것. 당연히 유전자의 소유권에 대한 분쟁, 그리고 친자 소송을 위한 유전자 감식등의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 크라이튼은 사람의 유전자가 결정할 수 있는 요소들을 신체적인 징후 이상의 분야로 확대시키면서 '법의 나라'인 미국이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큰 혼란을 맞닥드릴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경종을 울린다. 목석인 사람에게 오르가즘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유전자, 반사회적인 사람에게 주입하면 효과를 볼 수 있는 성숙 유전자, 심지어는 충동적인 사고를 많이 저지르는 사람 역시 유전자의 구성으로 '정해진 행동'을 따르게 된다는 이론, 그리고 이 이론을 통해서 법망을 피하는 시도 역시 -허황되지만 법으로 먹고사는 나라인 미국에서는-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역시 미국적인 스펙트럼. 아직 정이 있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책을 덮은 뒤 그다지 기분이 개운하지는 않다.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몇몇 캐릭터들이 위험을 벗어나긴 했지만 그들이 겪은 위험이 유전자 공학이 정점에 다다른 현대 사회에서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다는 암울한 가능성 때문이고 (아마 이건 작자의 의도에 부합한 감상일듯), 두번째는 어떤 종류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정도로 캐럭티들에게 동화될 구석이 없이 산만한 내용의 구성 때문에 사건들의 해결 이후에도 그냥 그 느낌이 밋밋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다.


크라이튼이 유전자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것은 알겠다. 차라리 여기에 대한 단편집으로 [넥스트]를 만들었다면 어땠을지? 연관성도 약한 캐릭터들을 동시다발로 펼쳐나가는 진행은, 이 분야에 능통한 다른 장인들만큼 늘씬하게 구현되지는 않은 것같다.


Trackback 1 Comment 2
  1. BlogIcon 크레아티 2007/09/25 07:45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걸어주신 트랙백 보고 찾아왔습니다 ^^
    정말 블로고스피어에는 대단한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언제나 많이 배웁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에피소드의 연결고리들이 좀 부실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제가 상세히 읽지 않아서 인가 했는데 좀 문제가 있긴 한가보네요.
    작가분이 좀더 친절했다면 좋았을텐데...^^;

    원서표지를 보고 푸하핫 웃어버렸습니다. 한국판 표지는 좀 무서운 느낌이었는데 원서표지는 원숭이가 귀엽게 보이네요^^
    심플해서 그런가봐요~

    • BlogIcon Jade 2007/09/26 19:15 address edit & del

      잘 오셨어요. 원숭이가 정말 귀엽죠? ㅋ

      저는 크라이튼 소설의 정점은 [폭로]같아요. 그뒤로는.. 별로...